무한/독서

[발췌] 한국의 능력주의

Mu Han 2023. 4. 23. 09:36


개인적 자질과 가정환경은 전적으로 우연히, 그러나 너무나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조건이다. 불법이나 편법이 아니라 해서 인생 출발선의 불공정이 자동으로 공정해지지는 않는다.

버트란드 러셀이 1922년 <중국인의 문제>라는 책에서 중국이 오래된 낡은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나기를 충고했을 당시에도 여전히 영국은 세습적인 상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러셀 자신도 귀족 출신으로서 여전히 귀족적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중 35.7%는 사조(직계 3대와 외주부) 안에 전현직 관료가 없는 일반 평민이었고, 사림이 권력을 장악했던 조선 중기가 아닌 조선 초기와 말기에는 계속 50%를 상회할 만큼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능력주의 사회였다. 2015년 기준으로 최근 10년간 사법시험 합격자 7,900명 중에서 고졸 이하 출신은 5명으로 합격자 중 0.06%에 불과했다는 점에 견줘보면,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상대적으로 '개천용'이 나오던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반 신분의 이중성이라는 말은 결국 획득 신분적 성격과 세습 신분적 성격이 공존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 전자가 강했던 반면, 후기로 올수록 후자가 강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역기능이 순기능을 압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기원 그 자체가 아니다. 역사 속에 흩어져 있는 능력주의의 닮은꼴들을 찾아내 오늘의 능력주의와 견주어보는 것, 그 능력주의의 맥락과 의미를 더 깊게 이해하는 것, 문제를 만든 요인과 지속시키는 요인을 구분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 그런 시도들이야말로 능력주의라는 역사적 구성물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만들어 줄 터이다.

지금 이십대들이 수행하는 '학력의 위계화된 질서'에 관한 집착은 과거의 학력주의보다 훨씬 정교해졌고 자기 내면화의 강도도 훨씬 높다. 이들에게 학력에 근거한 비교와 차별은 당연한 것이 됐고, 이를 의문시할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각자의 출발선이 아무리 달라도 객관적 지표나 성적에 따라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아마도 약자 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정책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로지 단 하나의 능력만이 필요하다. 요령을 터득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푸는 능력이다. 이것이 메리토크라시가 아니라 시험주의, 곧 테스토라시다.

명백히 불공정하거나 부조리한 사태를 두고서도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공정하다는 자신의 가설을 수정하는 대신 피해자가 잘못했다거나 '그럴 만했다'고 여기곤 한다.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이 아타나면 사실에 맞게 기대를 수정해야 타당할 테지만 그러지 않고 거꾸로 기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에따라 역설적이게도 공정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공정한 세계를 만들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공정세계 신념'은 여러 현상을 설명해줄 수 있는 집단적 인지 오류로서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됐고, 특히 피해자나 약자를 사회적으로 과도하게 비난하는 이유에 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단지 능력의 경쟁이 아니라 다층적 차별이 작동하는 기제

'선진국' 출신이냐 '후진국' 출신이냐에 따라 철저하게 위계서열을 만들어 외국인을 다르게 대하는 한국인 특유의 행태

타자를 향한 혐오 차별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혹은 '정상 존재'로 규정하는 인식을 동반한다. 이런 원시적인 이분법, 즉 내집단/외집단 구분을 통해 인간은 쉽게 타자를 차별하고 혐오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학대하고 죽일 수 도 있다.

자기표현 가치가 약하고 세속 합리적 가치와 생전적 가치가 공히 강한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가치 획일성이다.

능력주의에 있어서 분배의 기준은 타고난 재능 외에도 노력과 (경제적) 기여가 있다. 노력은 재능이나 기여보다 더 도덕적, 직관적 호소력이 강한 요소이다.

2016년 미국 포틀랜드 시의회는 경영자의 과도한 연봉에 법인세를 더 부과하는 법안을 미국 최초로 도입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경영자의 연봉이 중각 직원 연봉의 100배를 넘으면 법인세를 1만 달러 인상하고 250배를 넘어서면 2만 5천달러를 더 인상하게 된다


- 박권일 -